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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급수부터 시작하지. 물길을 열게."
샤린의 지시에 우리가 발걸음을 옮겼다. 하류로 조금씩 빠져나가는 계곡의 웅덩이 옆으로는 돌로 구배를 잡아 물길을 내놨는데 중간에는 장정한명이 충분히 들만한 크기의 바위가 물길을 강제로 막고 있었으며, 그 끝에는 마법진이 그려진 평평한 흑색돌이 있었다.
우리가 물길을 막고 있는 바위를 치우는 것을 확인한 샤린이 조용히 시동어를 읆었다.
"디멘션 게이트(Dimension Gate)."
그러자 마법진에서 자줏빛 빛이 남과 동시에 세모꼴로 된 성인머리만한 크기의 문이 나타났다. 문안은 새까만 와중에서도 하얀 점들이 빛나며 소용돌이처럼 돌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신들만이 사는 세상의 끝이라는, 우주와도 같았다.
나와 라만 이등병, 세레나 일등병은 직접 보는게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잠시 넋을 잃고 홀린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두 물길도 한꺼번에 열게. 세개 동시에 가동시킬 테니."
"아, 그게 가능한 일이었습니까?"
칼라 병사장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듣기론 보급전용 차원도약게이트는 소초별로 하나씩 총 3개가 지정되어 있었는데, 정식적인 운용방침은 한번에 한개씩만 가동한다고 들었다. 샤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에겐 불가능하지. 허나 내가 누군가?"
"잘 알겠습니다."
빠른 속도로 납득한 칼라 병사장이었다. 어느새 3개의 물길이 다 열려 깨끗한 계곡물이 쏟아졌고, 샤린이 만들어낸 3개의 게이트가 밀려오는 물을 거침없이 빨아들였다.
칼라 병사장은 품에서 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게이트에서 소초로 넘어가는 물은 이미 수십년동안 보급을 하면서 시간당 얼마나 흘러오는지 계산이 다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수레를 끌고와 모포를 바닥에 깔고 안에 있는 3개 소초의 식량들을 서류에 적힌 숫자에 맞춰 나열했다.
"급수는 여기까지 하면 될거 같군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가. 말을 마친 칼라 병사장이 우리에게 손짓했다. 우리는 처음 물길을 막고 있었던 바위를 2인1조로 들어 원래의 자리로 갖다놓았다. 그러자 콸콸 흘러내려오던 물이 금세 잦아들었다.
그뒤로는 20초를 센 뒤, 식재료 운반을 시작했다. 소초안에서 물을 받은 취사병이 식재료 받을 준비를 해주기 위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3인1조가 되어서 건네고 건네는 과정, 일명 받아치기로 식재료를 하나 둘씩 건네기 시작했다. 
"빨리 하는 건 좋지만 상하지 않게 조심해서 받아."
"알겠습니다."
꼼꼼히 살피며 주의를 주는 칼라 병사장에게 대답한 우리는 앞으로 옮기는 행위만을 한동안 반복했다. 
일주일치면 3개 소초의 병사와 간부들을 150명으로 잡아도 삼천끼가 넘어가는 양이었다. 더군다나 원래는 세개의 게이트 중 하나씩만 가동해야 해서 무척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운좋게도 샤린 타라크만이라는 거물을 만나는 덕분에 시간을 삼분지 일로 줄일 수 있었다.
"휴우, 마지막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모두가 땀을 쓸어내리며 바닥에 덜렁 드러누웠다. 씻어서 온 몸이 깨끗했던 게 바로 몇시간전이건만 다시 땀으로 흥건했다. 식재료가 다 들어가자마자 게이트를 닫은 샤린도 주먹으로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껄껄껄, 일하는 솜씨들이 전부 장난이 아니구만. 아주 훌륭해."
"다 샤린님의 뛰어난 마법적 능력 덕분입니다. 설마하니 3개를 다 여실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깐 말이죠."
덕담이 오니 덕담이 갔다. 그리고 붉은 잎도 왔으니, 칼라 병사장은 그것을 받으며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지만 뒤에 있던 우리는 입이 귀에 걸린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너무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하아. 우리 분대장님은 다 좋은데 너무 애연가시라니깐."
"껄껄껄, 아랫사람들이 저리 편하게 핀잔을 주다니, 자네도 참 알만하네."
"좋은 의미겠지요?"
웃으며 대답한 칼라 병사장이 프레카 상등병을 향해 눈짓을 주었다. 검집에서 단검을 집어든 그녀는 따로 빼놓은 사과 6개를 나무장작을 깎아 만든 도마에 올려놓고 빙글빙글 돌리며 깎기 시작했다.
속칭 꽁쳐놓은 사과였다. 각 소초에서 2개씩 뺀거였는데 받는 양이 워낙 많아서 취사병도 그정도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나를 비롯한 일이등병들은 습관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잠자코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란 핀잔만 듣고 도로 돌아왔다. 
"내가 사과를 좋아하는 건 어찌 알고 저리 빼놓았는가?"
"샤린님의 백결 중에 세결이 빨간 사과모양인데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후후."
나는 그 얘기를 듣고나서야 알게 되었으니, 눈썰미조차 뛰어난 칼라 병사장이었다. 그는 시계를 보고선 턱을 짚은 채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보자, 우선 시간은 넉넉한 편이군요. 두시간 뒤에 올라가도 될 듯 싶습니다."
그 사이에 프레카 상등병이 먹기 좋게 자른 사과를 쟁반에 담아 늘어놓았으니, 이제야 이야기를 늘어놓기 좋은 그림이 펼쳐졌다. 우리는 마치 어린시절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꼬마들처럼 샤린을 중심으로 둥글게 늘어앉았다.
"그래, 이 늙은이의 과거가 그렇게나 궁금했던 모양이지?"
"한번도 밝히신 적이 없으셨으니까요. 세간엔 문어발처럼 바람피다 걸리셔서 도망쳐왔다고 하더군요."
칼라 병사장의 농담에 샤린이 보급소가 떠나가라 웃었다.
"...하하하. 차라리 그랬으면 좋으련만..."
웃음을 그친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자조적이었다. 침울함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잠시 정적이 흐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자네들, 사역마가 뭔지 아는가?"
"사역마요?"
샤린의 질문에 우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마법사의 불모지였던 아르고니아에는 생소한 개념이었지만 샤린이 처음 망명오고 수없이 제자를 가르치길 60여년. 나무가 점점 뿌리를 뻗어나가듯이 인식이 정착되어 지금에 와서는 일반인들도 마법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은 알게 되었다.
마법사가 자신의 마력을 대가로 주종관계를 맺는 대상을 뜻하며, 대개는 생물이나 정령을 사역마로 둔다고 한다. 수준이 높은 마법사일수록 상대적으로 더 지능이 높은 대상을 사역마로 둘 수가 있다고 하던데, 사실 태어나서 한번도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막 처음 보게 됬다.
"나와보려무나."
쿠룩 쿠룩
"우왁, 깜짝이야!" 
내 어깨 위에서 하얀 새 한마리가 느닷없이 생겨나더니 날개를 활짝이다 샤린의 손바닥 위에 앉았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표정들을 보니 다들 나처럼 처음 보는 모양이다.
"내 사역마, 정령의 피를 가진 인비저블 버드지. 이름은 쿠루루라네."
이름이 왜 쿠루루인지 단번에 이해가 되버린 탓에 나를 비롯한 몇몇 고참들이 입에 손을 대고 잠시 쿡쿡거렸다. 샤린도 머쓱한지 수염을 어루만졌다.
"나와 평생을 같이 한 친구라네. 망명오기 전부터 키웠으니깐 말일세."
"어머나, 이 귀여운 새도 우리보다 한참 어르신이군요." 
머리를 어루만지던 프레카 상등병이 슬그머니 손을 떼었는데, 쿠루루가 날개로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길래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웃다 다시 손을 가져갔다.
"그렇다네. 이야기가 샛길로 조금 샜군 그래. 펜타그라프에 오기 전 나는 말일세..."
말끝을 흐리던 샤린 타라크만의 목소리에서 잠깐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쓸쓸한 웃음을 짓던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인간 사역마였네."
"...네?!"
"결혼이란 악마의 계약이 나를 살아있는 사역마로 만들었지."
드디어 우리가 고대했던, 샤린의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촉망받던 수재였다고 한다. 펜타그라프의 귀족명문가인 타라크만 가에서도 100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하는 인재. 가문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그는 불과 17세의 나이로 정식마법사 자격을 취득했고, 23세의 나이에 한 학파의 부마탑주가 되었다. 
잘생긴 외모에 출세가도까지 달리고 있었으니 여인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고, 덕분에 젊은 시절의 그는 무척 자신감 넘쳤고 오만했다고 한다.
"펜타그라프에선 정략결혼이란 게 분명히 존재했지만, 일정능력 이상이 되면 본인이 선택할 권리도 존재했었지."
당시 외모를 최고의 가치로 두었던 그는 자신을 흠모하는 여인들 중 가장 아름다웠던 베르실라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는 오래전엔 명망있었으나 지금은 몰락한 귀족가의 여식이었고, 자신의 마탑에서 가장 밑바닥에 종사하는 수습마법사였다.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 샤린은 교제를 시작한지 불과 한달만에 청혼했고, 곧이어 펜타그라프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화려한 결혼식이 열리게 되었다.
새하얀 피부와 연한 핑크빛 머리칼, 은은한 장미향을 풍기던, 그 아름다운 베르실라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태를 보는 순간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확신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행복하게 끝났다면 이 노구가 망명 올 일이 없었겠지."
  • SKEN 2020.06.19 20:43
    전설적 인물의 등장과 그 인물의 입을 통해 듣는 과거로 넘어가는 전개가 매끄럽고 자연스러워서 몰입이 확 되네요. 거기에 절묘한 타이밍의 끊기까지! 많이 배우고 갑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