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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은 키가 컸다. 아지는 키가 비슷했던 녀석이 이렇게 자랐다는 사실이 가끔은 믿기지 않았다.

유난히 발육이 느린 아지 아지 옆에 있으면 더욱 커보였다. 아지는 성현의 가슴팍 정도였다. 성현은 어느새 목젖이 튀어나와 있었고, 수염도 나기 시작해 면도도 간간히 하고 있었다.

아지와 성현이 떨어져 있던 시간동안 성현은 훌쩍 자랐지만 장난기가 가득했던, 말도 안되는 일에 무작정 덤비고 봤을 때, 유난히 번득이던 짙고 맑은 검은 눈동자는 여전했다. 짧게 자른 머리는 까만 밤송이 같았지만 성현과 잘 어울렸다. 이목구비는 성격만큼이나 시원했고, 아이의 장난기가 묘하게 서려있는 얼굴은 제법 멋스러웠다.

거기에 속에서 우러나오는 환한 미소를 짓는 성현의 모습을 보면, 아지는 내심 따르는 여자가 많을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성현은 키만큼이나 손도 커서, 아지가 멀뚱히 쳐다보면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아지의 양 빰을 한손으로 쥐다시피 잡고는 눌러댔다. 아지가 성현을 때리러 손,발을 뻗어보면 성현은 잽싸게 도망쳐버렸다. 아지가 한참이나 쫓아다니면 성현은 실실 웃으면서 아지에게 잡혀줬고, 힘을 다 빼버리고 화도 사라져버린 아지는 성현의 배가 가슴을 주먹으로 툭 치고는 말았다. 성현을 툭 쳐보면, 제법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성현은 운동을 참 좋아했다. 축구, 농구, 배구……. 가리지 않고 즐기는 편이었다. 시원스런 성격에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제법 하는 편에, 교우관계도 원만했다. '엄친아'에 속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던 아지는 속으로 냉소를 한번 짓는다. 어렸을 때, 자신있게 모험을 떠난다고 아지 아버지가 아끼던 요트를 몰래 타고 나갔다가 바다에 표류를 당하고는 엉엉 울던 이 바보가 엄친아라니. 이 녀석하고 얽히고 엉킨 과거가 너무 많아 쉽사리 인정하기 어려웠다.

─아지야

─왜

─어떻게 같은 학교였는데 모를 수 있었지?

─몰라

성현은 놀랐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지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했다.

─와. 여전히 작은 키만한 말투.

─됐어.

아지는 성현의 손을 치워버리고, 성현을 만나러 온 김에 사놓은 맹탕의 온도가 되버린 스포츠 음료 캔을 던졌다. 성현은 능숙하게 받았다. 농구 코트에서 공을 튕기곻 있는 성현의 길거리 농구 팀원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1 대 1 반코트 경기를 하고 있었다.(사실, 시끄러운 것은 한 명뿐이었다.)

성현은 농구화를 벗어던지고, 파란 박스티도 벗어놓는다. 그의 건강한 상체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희미한 땀냄새가 아지의 콧 끝을 스친다. 나쁘지는 않았다. 성현이 짧게 자른 손톱으로 여러번 시도한 끝에, 캔 뚜껑을 따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아지는 기지개를 켰다. 뜨거운 태양광선이 아지의 얼굴에 쏟아진다.

─성현아

─응?

─키 몇이야?

─아마 188이던가

─…… 불합리해. 정말로

아지의 말은 농구공이 링 속으로 기분좋게 빨려 들어가, 링의 쇠사슬을 흔드는 소리에 사라졌다. 날씨가 너무 좋은 토요일이었다.

─같이 한판할래?

성현의 물음에 아지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지는 학교 곳곳에 설치된 야외 농구장에 가까운 스텐드에 앉아있었다. 하얀 티와 빨간 반바지로 구성된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 사이로, 아지는 농구공을 받아낸 성현을 바라봤다. 성현은 공을 스틸하러 달라드는 아지네 반 애를 여유롭게 따돌리고는 외곽포를 던졌다. 어렸을 때, 스포츠만화를 보더니, 난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를 외치면서 3점슛을 계속 던지던 성현은 만화 속의 한장면처럼 공을 우와하게 던졌다. 힘차게 손에서 던져진 공은 긴 곡선을 그리더니 링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31:34!

심판을 맡은 체육선생의 말에, 점수판은 31:34로 바뀐다. 스텐드에서 응원하던 아지네 반 아이들은 탄식을 내뱉으면서도, 성현의 3점슛이 멋지다고 술렁거린다. 벌써 4개째. 아지는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성현이 날새도록 연습에 몰두했을 떄, 아지가 옆에서 공을 던져주고 있었다. 볼보이로 말이다. 그때 형편없던 실력과 비교해보면 정말 일취월장이었다.

─막아!

─성현이 또 3점슛을 쏘려한다!

반 아이들은 성현이 공을 스틸을 하자, 아우성이었다. 성현은 수리를 하러 오는 애을 무시하고는 또다시 3점슛을 던졌다. 텅─. 공은 링을 맞고 튕겨오른다. 키가 성현보다 큰, 레게머리의 흑인 소년이 탄력적으로 뛰어오른다. 197로 알려진 흑인 소년은 양손으로 공을 그대로 잡고는 링에 내리 꽂았다. 링은 휘청거리고 흑인 소년은 가볍게 코트로 뛰어내렸다. 꽤나 잘들어간 덩크.

─ 31:36!

점수는 또 벌어졌다. 아지네 반인 1-E반이 성현의 반인 1-A반을 추격하고 있는 형태였지만 쉽사리 점수는 좁혀지지 않았다. 

─아오, 저 깜둥이

─흑인 근육은 다른가

아지 반의 남자 아이들이 비난조로 흑인 소년에 대해 투덜거리다, 1-E반의 자칭,타칭 에이스인 마르코라는 애가 흑인 소년에게 공을 스틸 당하자 냅다 막으라고 소리친다.

─젠장, 마르코 어서 뛰어

─누가 존슨을 마크해

1-E반의 바람과 달리 흑인 소년, 존슨은 특유의 리듬감으로 탄력적으로 뛰어올라 또 덩크를 내리꽂았다. 31:38. 성현과 존슨은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흑인인 존슨과 황인종인 성현이 친하게 보이는 모습이 이상하지 않았다. 이 섬은 다양한 국적, 다양한 인종이 사는 곳이고, 학교는 백인종,황인종,흑인종이 어울러 지내는 곳으로 특히 더 그랬다.)

자기반이 지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있는 1-E반의 아이들과 달리, 아지는 그냥 무덤덤하게 농구경기를 보고 있었다. 존슨에게 공을 가로채기 당했던 마르코가 공을 링으로 던졌지만 공은 튀어올랐다. 존슨이 공을 리바운드 하려 했지만, 그보다 앞서 공을 리반운드해 존슨 못지 않는 덩크를 집어넣은, 짧은 머리에 스크래치를 화려하게 낸 무뚝뚝한 인상의 근육질의 백인소년은 존슨을 보고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수비에 가담했다.

─역시 세르게이!

1-E반 아이들은 백인 소년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들창코인 존슨의 코는 벌렁거린다. 성현은 리바운드에 밀렸다는 사실에 흥분한 존슨의 어깨를 두들기고 공격에 나섯다. 세르게이는 투견처럼 보이는 인상과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새파란 벽안(壁眼)을 가리키다 존슨을 가리킨다. 흥분한 존슨이 공을 집어던지고 세르게이를 향해 나아가려고 했을 때, 경기 끝을 알리는 호루라기가 울렸다.

33:38. 1-A반의 승리였다.

A반은 환호성을 질렀고, E반은 탄식했다. 체육선생은 냉정하게 정리하고 들어가라고 말하고는 교무실로 떠나버렸다. A반은 삼삼오오 모여서, 교실로 향했고 E반은 어질러진 농구공을 치우기 시작했다. 성현은 반 친구가 던져준 흰 수건으로 땀을 닦고는 2시간 정도 A,E반이 자유투 연습을 하던 공을 카트에 집어넣던 아지에게 다가왔다.

─아지야

─왜

─도와줄까

─됐어

성현은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쭈구려 앉아 농구공을 집어들고 있던 아지의 단발머리를 엉클었다. 아지는 이게 무슨짓인가 하는 눈으로 성현을 바라보자, 성현은 '그럼 수고해'라는 짧은 맑을 하며, 세르게이와 눈싸움을 하고 있는 존슨을 끌고가다시피 달래며 교실로 돌아갔다. 성현에게 신경을 꺼버린 아지는 카트에 농구공을 넣기위해 일어섰을 때, 아이들의 시선을 느꼈다. 의외라는 시선. 불쾌하다는 시선. 알 수 없는 시선이었다.


체육수업이 그 날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아지는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는 살짝 땀이 묻은 체육복을 쇼핑백에 담았다. 시끄러운 종소리가 싸이렌처럼 복도에 울렸다. 왁자지껄한 수다소리가 순식간에 복도에 가득 매웠다. 아지는 쇼핑백을 손에 쥐고 탈의실에서 나왔다. 많은 아이들이 오가는 복도는 소란 그 자체였다. 아지는 학교 A동 현관으로 향했다. 탈의실과 A동 현관은 가까웠다. A동 현관에는 아지가 1년동안 빌린 개인용 케비넷이 있었다. 아지는 미리 넣어둔 가방을 꺼내기 위해 케비넷으로 향했다.

─잠깐만

등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아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아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야!

날카롭고 하이톤의 목소리. 아지는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 곱슬머리를 풀어헤친 여자애가 아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자애는 하얀토끼모양의 머리핀으로 앞머리를 단정히 정리했다. 턱선이 고운 아이. 맨들맨들한 드러난 이마에, 머리카락처럼 붉은 눈썹은 가늘고 길었다. 마치 저녁놀의 유독 짧지만 강렬한 순간이 만든 인상이 연상되는 아이였다. 여자애는 아지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키도 크고 성숙해서 모델같았다. 셔츠는 전부 잠그지 못해, 3개정도 풀어놓고 넥타이는 목이 답답한지 풀어놓았다. 여자아이는 뭐가 마음에 안드는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었다.

─야, 무시하니? 내가 너 부른거 맞거든?

─…… 루비라고 했던가

아지는 자신을 향해 이유 모를, 적의가 가득한 말투로 말하는 아이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 속삭이듯 혼자 중얼거렸다. 대단히 결례일지는 몰라도, 다행히 루비일지 모르는 여자애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유난히 사람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지는 저 애가 같은 반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름이 루비가 맞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루비일지 모르는 여자애는 허리춤에 길고 고운 자신의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 루이야. 어떻게 같은 반이 된 지, 꽤 됐는데 모를 수 있어?

─ 미안

어이없다듯 웃음을 터뜨리며 루이는 성큼성큼 아지에게 다가왔다. 아지 앞에 바로 선 루이의 우월하게 발달한 가슴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아지는 키때문에 루이의 얼굴을 보기위해서는 고개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아, 짱나네. 됐고 용건만 말하고 갈께

루이는 아지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자신의 용무만 서둘러 말했다.

─성현이랑 무슨 사이지, 네 까짓게 성현이랑 장난치고 있다는게 말이 되?

─그냥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야

─소꿉친구?

루이의 목소리는 약간 힘이 들어가 있었다. 툭하고 손대면 끊어질 것 같은 느낌. 아지는 고개를 끄덕여 루이의 질문에 답했다. 루이는 양손을 늘여뜨렸다.

─난 또 대단한 사이라고, 이런 사교성 없는 땅꼬마랑 그럴리가 없지

─…….

─너, 소꿉친구 이상은 아니지?

─…….

─다행이네. 행여나 성현에게 앵겨붙지마.

혼자 묻고 혼자 답한 루이는 아지를 툭 치고는 아지의 기억속에 이름도 희미한 반 여자애들 무리로 사라져버렸다. 자기들끼리 아지를 보고 수근거리다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아지는 잠깐 아이들을 보다가,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캐비넷의 지문인식장치로 된 잠금을 해체하고, 가방을 꺼내 A동 현관을 나갔다. 아무래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성현과 엮이면 피곤해. 아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지가 현관을 나서자마자, 교정에서 공을 튕기고 있던 성현과 마주쳤다. 성현은 아지를 발견하고는 농구공을 한손에 움켜쥐더니, 옆구리에 끼어넣고 아지에게 달려왔다.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성현이 말했다.

─이제야 오냐, 한참 기다렸잖아

─…….

─뭔 일 있었어?

─신경 꺼

아지는 성현을 무시하고 걸었다. 성현은 아지 등뒤로 따라 붙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까칠해졌네

─……

─그러니까 키가 안크는 거야

아지는 자신을 쫓아오면서 터무니 없는 말을 하는 성현을 바라봤다. 성현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순간 아지는 자신이 바보 같아 보였다.

─농담이야. 농담.

─……

─아지야, 내일 농구 할래?

─별로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성현은 웃으면서 받아 넘겼다. 그리고 이런저런 말을 걸었고 아지는 대충 맞장구 치면서 걸었다. 그리고 역으로향하는 셔틀버스 정거장에서 성현은 자신을 친구들이 찾는다면서, 아지와 헤어졌다. 아지는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도 디에고는 없었다. 아지는 건물 틈사이로 겨우보이는 하늘을 보고는 생각했다.

오늘은 조금 엉망인 것 같아.


별로 친하지 않은 반 아이, 루이의 대단치 않는 엄포가 있었고, 같이 놀자는 성현을 거절하고, 디에고와 마주치지도 못한 금요일이 지나고, 지난 토요일처럼 아지는 늦잠을 자고 있었다. 학교는 주 5일제라 아지는 밀어두웠던 책을 읽다가 늦게 잠들었다. 그리고 늦게 일어나 멍하니 하루를 보낼 지난 토요일의 반복이 예정되어 있었다. 불청객이 아지를 흔들어 깨우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지는 잠에서 깨, 부스스한 눈으로 힘겹게 눈을 떴다. 아지를 닮은, 그러나 확연히 다른 남자가 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나라

─…… 오랜만

─일단 씻어, 시간이 없다

아지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팔목시계를 쳐다보고 말하는 남자를 바로 알아봤다. 그야 당연했다. 자신의 나이차 많은 오빠, 아진이었으니까.


  • 홍차매니아 2012.01.16 21:43

    대체 무슨일이 일어나는 게냐. 군대에 있는 네가 소설을 올리다니. 대체 무슨 조화냐.

    여하간 반갑다.